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충주 탄금대 전투 (문단 편집) === [[신립]]의 자질 부족설 === 신립이 전술적 안배로 조령~충주 사이 산길을 다 버렸다 치자. 그래서 탄금대에선 제대로 지휘를 했나? 옹호론자들이 전장 선택에만 집중하느라 혹은 의도적으로 무시하는데 '''신립의 전투지휘는 엉망이었다.''' 적에게 어느 정도 유의미한 피해를 입혔다면 전술적 사고에 아쉬움은 있으나 야전에서 저돌적인 지휘 능력은 뛰어났다고 다른 부분에서 고평가할 여지가 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어떠했는가? 수비전에서는 영 아닌 듯하다. 신립의 기록을 보면 대부분이 [[니탕개의 난]] 등 토벌(공격)할 때가 많았다. 물론 신립도 문경새재에서 농성하는 걸 고려를 해봤을 것이다. 하지만 수비전도 단점들이 존재하는데 문경새재에서 농성하면 적들도 바보가 이니니 성 주위를 포위하고 보급을 차단하거나 [[투석기]], 토성을 쌓거나 땅을 파서 강물로 침수시키는 여러가지 방법들이 존재한다. 기병 지휘에 좋다면서 선정한 전장인 달천변의 사주 지형은 서쪽의 강과 논밭, 좁은 진격로와 각종 장애물 때문에 기병의 기동을 극히 제한시켰고 바로 앞에 보이는 고니시의 중군에만 집중하느라 충주성 방면으로 우회하는 일본군은 전혀 신경쓰지 못했으며 수적으로 더 많았던 보병대는 후방에 처져 있고 기동력을 제한당한 기병대만 홀로 적진에 돌격하다 일거에 밀려 거의 피해를 주지 못했다. 회전에서 기본인 보병과 기병의 연계가 전혀 이뤄지지 못했고 충주성에 방어 병력도 변변한 시설도 없음을 모르지 않았을 사람이 역시 우선적으로 대비해야 할 적의 우회기동 여부도 무시했다. 전장 선정 문제를 제쳐놓고 당일의 전투양상만 살펴봐도 '''결함투성이''' 었다. 대부분 사람들조차도 인정할 정도로 북방에서 화려한 전공을 세우고 조선 최고의 무장으로 우대받은 신립이지만 실상 지휘관으로서 능력은 죽을 때까지 검증된 바 없었다. 일단 명성에 비해 기록도 적고 [[제승방략]]과 [[조선왕조실록]]에서 보여지는 신립의 전공은 철저히 신립 개인의 무예와 용맹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 그의 지휘 능력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은 없다. 신립의 무명을 있게 한 1583년 [[니탕개의 난]] 토벌 기록조차 그렇다. 1583년 초 안원보 전투에선 도망병 1명을 참수하고 혼란에 빠진 군사들을 재정비하긴 했으나 [[여진족]]의 약탈 자체를 막진 못했다. 이 해 봄에 벌어진 경원진 전투에선 백마를 탄 적장을 한 방에 사살해 적을 물러가게 했으나 그 외에는 죽을 힘을 대해 싸웠다는 대목뿐이다. 신립이 가장 빛났던 전투는 역시 봄에 벌어진 훈융진 전투인데 여진 기병 1만에게 포위된 아군을 구하기 위해 적진에 뛰어들어 추장 1명을 사살하고 후퇴하는 여진족을 추적해 70명을 사살했다. 문제는 기록상 신립이 천하의 명궁에 기마술이 대단했다는 건 알 수 있어도 전술적인 능력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여름에 치뤄진 종성진 전투에선 여진 기병 주력이 이미 철수한 상황에서 구원병으로 도착해 적 2명을 참수한 게 전부다. 탄금대 전투에서도 강물에 뛰어들기 전까지 김여물과 함께 적 수십 명을 쳐죽였다는 기록이 있으니 정말 싸움은 엄청 잘했던 거 같지만 전략 전술적 역량은 전혀 검증된 바 없다. 전근대 동양 전쟁 기록이 동시기 서양에 비해 축약이 심해 '몇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어디를 쳐서 크게 승리했다' 식의 기록이 전부라 기록만으로 신립의 역량을 알 수 없다는 주장이 있는데 '''신립은 예외다.''' [[이일]]이 정리한 제승방략에서 신립의 대 여진 전투를 전훈으로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함경도 북방의 진보와 주둔 병력, 편제, 지형지물들을 모두 상세히 적은 이 책은 후대에 참고할 수 있도록 이순신의 [[녹둔도 전투]]를 비롯한 전투 수십 개를 당시 동양 기준으로 상당히 상세하게 기록했다.[* 전투별 차이는 있는데 선조 이전에 벌어진, 상당히 오래된 전투도 수록하고 있기 때문이다.당대에 벌어지지 않은 전투는 당연히 세밀함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오늘날 우리가 이순신의 녹둔도 전투에 대해서 한 눈에 알 수 있는 것도 이 기록 덕분인데 그건 참조하면서 신립의 기록은 간략해서 믿을 수 없다는 건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신립은 이일이 상세하게 남겨준 덕분에 사료 유실이 극심했던 임진왜란기 지휘관 중에 [[난중일기]], 임진장초, [[장계별책]]이 남아 있는 이순신 다음으로 기록이 풍부한 지휘관이다. '''신립의 전술이나 성향을 살피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패전하고 죽은 지휘관은 아군이 전멸해 기록이 제대로 남지 못한 경우도 많은데 신립은 마지막 전투인 탄금대 전투 기록도 상당히 풍부하다. 고니시가 세키가하라에서 몰락해 그의 가문에 남아있던 임진왜란 참전 기록이 유실되는 와중에도 일본측 기록인 서정일기가 남았고 전투 참전자로 조선군이 무너지는 걸 직접 보았을 신흠이 빠져나와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기록에서 신립은 일신의 용맹 외의 전술적 역량을 보여준 바 없다. 니탕개의 난 때 준동한 여진족은 규모는 상당했지만 어디까지나 약탈을 위해 움직였다. 최대 1만~2만 정도로 뭉쳐 소규모로 분산 배치된 조선군의 방어 진지를 공격해 무너뜨리고 약탈을 자행한 후 돌아갔다. 약탈을 하지 못해도 조선군 지원 병력이 도착하거나 조선군의 저항이 완강하면 큰 고민없이 물러났다. 즉 내부 통일을 이뤄 국가 단위로 성장한 [[누르하치]] 시절과 비교하면 수준이 현격히 낮았다. 무예 이외의 다른 부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는 기록도 없는데 성격은 또 '''굉장히 거칠고 오만했다.''' 신립이 난폭하고 아랫사람을 함부로 다룬 것은 [[징비록]], 상촌집, [[기재사초]], [[난중잡록]], [[계갑일록]] 등 여러 사료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선조수정실록에선 탄금대 전투를 앞두고 일본군이 조령을 넘었다고 보고한 군관을 미친 소리 한다며 죽여버렸다는 기록도 나온다. 정식 보고 절차도 없이 동네방네 일본군이 온다는 말을 퍼뜨리던 농민을 하루 기다려 처형한 이일은 어쨌든 그 농민이 장담한 하루의 시간 동안은 기다려주었고 당시 이일 군이 처한 열악한 상황과 엄격한 전근대 군법을 감안하면 있을 법한 일이지만 신립에게 죽은 군관은 정식으로 보고 절차를 거쳤음이 분명하기에 어떻게 변호할 여지가 없다. 또한 그는 일본군을 대놓고 얕잡아 보았고 군 경력으로 선배이자 상주에서 일본군의 전술과 규모를 파악했던 [[이일]]의 조언을 대놓고 무시했다. 이일이 북도 제승방략을 정리한 인물이자 신립처럼 여진 기병과의 전투에서 무명을 쌓은 인물이란 점을 고려하면 그의 말은 결코 무시해도 되는 게 아니었다. 이일은 북도 제승방략을 체계화하며 군사 이론가로서 괜찮은 모습을 보여줬고 왜란 당시에도 일본군에 대한 정보가 아예 없었거나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적을 맞았다. 이에 반해 신립은 할 수 있는 최대의 지원을 받아 병력도 비교적 충실했고 조령이란 험지를 방어 거점으로 활용할 시간이 이틀이나 주어져 있었다. 게다가 이일에게서 일본군의 전투 방식에 대한 정보까진 전해들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 모든 이점을 무시했다. 험준한 조령을 포기하고 기병을 운용하기 힘든 탄금대를 회전 장소로 골랐고 이일과 김여물의 조언도 무시했다. 전투 직전 일본군의 동향에 대해 보고한 장교를 보고 내용이 마음에 안 든다고 죽여버린 데서 알 수 있듯 신립은 용맹하긴 하나 이성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그가 가진 군대가 한양과 일본군 사이의 '''유일한 야전군'''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것이 얼마나 신중치 못한 행동이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종합해보면 신립은 일신의 무예 외에 제대로 된 지휘 능력을 보여줬다는 기록은 신립을 호의적으로 적은 사료에서조차 존재하지 않으며 인격면에선 안하무인에 부하들에겐 막되먹은 상관이었다. 여기에 왕의 [[사돈]]('''당시까지 계승이 유력하던''' [[신성군]]의 장인)이 된 데다가 상방검까지 받자 눈에 보이는 게 없어졌다고 하면 일본군을 깔보고 탄금대를 선택한 이유와도 맞아 떨어지지 않는가? 조선 시대 내내 지속된 신립에 대한 비판은 실전을 모르는 유생들의 입놀림이 아니었다. 당시는 [[철도]], [[고속도로/대한민국|고속도로]]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영남과 서울을 오갈 때 자연스럽게 조령의 험준한 고갯길을 '''직접 체험'''해야 했다. 이 험한 고갯길을 넘어가던 시대의 사람들에게 탄금대보다 조령 고갯길이 방어하기 훨씬 좋은 지형이라는 건 몸으로도 느낄 수 있는 사실이었다. 위에서 충주가 요충지라 했는데 신립은 충주성조차 버렸다.[* 다만 충주성 역시 쉽게 포위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탄금대보다 최적이 아니라는 시각은 엄존한다. 이상훈 교수의 경우 충주성의 경우 포위될 수 있는 반면 탄금대는 후방의 수로를 통해 지속적으로 지원군 + 근왕군이 올 수 있으므로 장기간 주둔하기에 더 적합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신흠의 상촌집 기록을 포함해 거의 모든 기록에서 신립은 전투 의지 만방에 지구전을 고려한 기색이 없으며 북방에서 활약할 때도 개인의 용맹을 활용해 돌격했지 지구전이나 다른 군략을 구사한 적이 없다.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신립의 탄금대 고집에 대해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주려는 정도로 볼 일이며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반면 이보다 3개월여 뒤에 벌어진 [[이치 전투]]에서는 험한 지형 요건을 활용하여 연대급도 안 되는 병력으로 사단급 병력의 침공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으니 어느 쪽이 더 가치있는 행위인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신립이 탄금대에 진을 친 것을 다른 쪽으로 해석한다면 탄금대 자체를 선택한 이유는 당연히 기병을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의미를 가지며 또한 적이 한양으로 도달하는 시간을 늦추기만 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애시당초 신립이 탄금대 전투를 앞두고 의기양양해 일본군의 전력 자체를 무시 내지 충분히 야전에서 돌파 가능하다고 판단했다고 가정한다면 전라도 방면의 근왕군 또한 생각의 범위 내에 있었을 것이고 탄금대에서의 전투를 어떻게든 승리로 이끌고 나서 전라도 근왕군과 합세한 이후를 상정한 작전이었을 가능성도 매우 적으나 있을 수 있다. 즉 신립이 탄금대 전투를 어떻게든 이기고 나서 전라도 근왕군과 합세 이후 도달하는 일본군[* 가토는 고니시와 거의 동일한 시간대로 진군하고 있었으니 논외. 물론 고니시를 격파했다고 해도 가토가 거의 동일한 시간대로 진군 중이었으니 고니시를 이겼다고 해도 가토가 남아 있는 형국이다. 신립이 일본군의 진군 자체를 파악함에 있어서 아예 가토를 놓친 것이 아닌가 심히 의심되는 부분.]을 상대하거나 하는 전략을 세운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첫째로 전라도 근왕군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는지도 명확하지 않으며 둘째로 자신이 직접 거느린 보병마저도 아무 기대없이 활용을 포기하고 기병에만 의지해버린 위인이 '''전라군의 북상을 알았다고 한들 유의미한 전력으로 계산을 했을지도 의문'''이다. 조경남이 전쟁 중 자신이 접한 모든 기록과 증언을 모아 저술한 난중잡록과 이를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수정실록에는 신립이 [[이일]]의 패배 소식에 "적의 기세가 강하니 후퇴해 [[한양]]에서 지키도록 하소서."라는 장계를 올렸다는 기사가 있는데 탄금대 전투 생존자인 신흠의 상촌집을 비롯해 거의 모든 조선 측 사료에서 신립은 전투 의지 만만에 적을 얕보고 있기에 서로 충돌한다. 하지만 한양은 방어에 용이한 요새같은 게 아니고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도읍이기 때문에 무언가 착오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외방의 군사는 모이지 않고 도성에는 전후하여 대부분의 장정들이 거의 징발되었으므로 도원수([[김명원]]) 역시 군사가 없었다. [[상주시|상주]]에서 (이일이) 패배한 보고가 이르고 '''신립(申砬) 또한 비밀히 아뢰기를 ‘적의 기세가 매우 드세니 도성으로 후퇴하여 지키도록 하소서.’ 하였다.''' >ㅡ 《조선왕조실록》 선조 수정 실록 25년 [[4월 14일]](계묘) 10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nb_12504014_010|기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